시진핑은 마오쩌뚱의 학생인가?

<시 따따(習大大)〉란 노래의 일부입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애칭이 ‘시 따따’입니다. ‘따따’란 시진핑의 고향인 산시(陝西) 사투리로, 아버지 연배나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로, 우리말로 아저씨라는 뜻입니다. 2014년, 시진핑의 친서민 행보가 절정에 이를 무렵 나온 노래입니다. 시진핑을 찬양하는 노래는 이밖에도 많습니다. <시 따따는 펑 마마를 사랑해(習大大愛着彭麻麻)〉란 곡도 있습니다. ‘펑 마마’(펑 아주머니)는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의 애칭입니다. 이 노래는 광장에서 집단으로 춤을 추는 아줌마 부대, 이른바 ‘따마’(大媽)들의 단골 춤곡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유명한 마오쩌둥 찬양가인 〈붉은 동방(東方紅)〉을 빗대어 <붉은 동방이 다시 붉다(東方紅又紅)〉란 노래도 나왔습니다. 중국 정치 지도자 가운데 마오쩌둥 이후에 이렇게 최고 지도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나온 것은 시진핑이 처음입니다. 이렇다 보니 한국을 비롯한 해외 언론에서 마오쩌뚱과 같은 시진핑 개인숭배와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마오쩌뚱 시대에 중국 사람들이 부른 마오쩌뚱 찬가와 시진핑 찬가 사이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마오쩌둥 찬가는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나서서 중국인에게 보급한 뒤, 중국인들이 애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시진핑 찬가는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노래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시진핑이 지금 중국인에게 얼마나 인기 있는 지도자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이런 분위기를 한편으로는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하기도 합니다. 우상화 논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올해 4월에 ‘시 따따’와 ‘펑 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홍콩《밍바오(明報)》가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시진핑은 마오쩌둥이 될 것인가? 시진핑은 마오쩌둥이 될 것인가? 최근 한국이나 해외 언론은 물론이고 중국 정치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관심거리입니다. 통상 중국 국가주석은 5년 임기제를 바탕으로 대개 중임을 하는데, 시진핑은 2018년 3월에 첫 임기를 마칩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시진핑이 1인 권력을 강화하여 장기집권을 계획하고 있다는 추측과 전망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언론의 이런 전망에 많은 중국정치 전공 학자들은 회의적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중국 헌법에서 국가주석은 5년 임기로 중임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시진핑이 장기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하고, 더구나 권력 분점에 바탕을 둔 집단지도 체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안정되게 유지되고 있는 지금 중국 최고 정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어려움 등등을 감안할 때, 그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외언론의 추측과는 상관없이, 중국인 마음에서 시진핑은 이미 마오쩌뚱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인의 마음을 보면 그렇습니다. 베이징 왕푸징 뒷골목인 유명한 기념품 가게만 보더라도 마오쩌뚱과 시진핑을 나란히 사진에 담아서 만든 기념품이 즐비합니다. 시진핑과 펑리위안 부부 사진을 담은 기념품도 많습니다. 해외 언론보도나 해외여론과는 상관없이 중국 민심은 시진핑을 이미 마오쩌뚱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해외 언론, 특히 서구 언론에서 시진핑이 마오쩌뚱이 될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여기에는 중국을 보는 냉전 이데올로기 시각이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중국은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주의 일당독재 국가여서 결국 1인 독재체제로 귀결될 것이며, 시진핑이 마오쩌뚱과 같은 지위에 올라서면 중국은 마오쩌뚱 시대로 회귀하여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전망, 혹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서구 사회의 기대(?)와 우려가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치가 과거 마오쩌뚱 시대와 달리 분권화, 제도화, 법치화의 길을 향해 많이 변화했다는 사실에 별로 의미를 두지 않고, 어쨌든 중국이 일당독재 국가라는 점을 크게 봅니다. 중국 공산당이 본질에서는 변화가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시진핑이 마오쩌뚱처럼 되고, 마오쩌뚱 시대를 재현할 것이라는 예측이 꾸준히 나오고 있는 것은 시진핑이 취한 일련의 조치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국 공산당은 2013년부터 영도소조(領導小組)를 만듭니다. 영도소조(領導小組)란 공산당 최고지도부와 당, 정, 군의 실무부서 사이에서 일종의 정책 조정을 하는 기구입니다. 정책 집행을 조율하고, 정책이 잘 시행되고 있는지를 감독하는 기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설된 4개 영도소조를 포함하여 9개 정도의 영도소조를 시진핑이 맡으면서 시진핑이 마오쩌뚱과 같은 막강한 권력을 쥔 일인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진핑이 마오쩌뚱처럼 될 것이라고 예측하거나 우려하는 판단에는, 비유하여 말하자면, 시진핑을 마오쩌뚱의 학생이라고 보는 시각이 깔려 있습니다. 사실 시진핑이 마오쩌둥이 될 것이라는 예측은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로 유력하게 부상한 2010년 무렵부터 나왔는데 주로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중국공산당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시진핑이 마오쩌뚱의 학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비판적 지식인의 상징인 베이징 대학 교수를 지낸 첸리췬(錢理群)은 시진핑 체제 출범이 예견되던 2011년에 이렇게 우려했습니다. “그들이 당시에 마오쩌뚱의 홍위병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지금 마오쩌뚱을 어떻게 평가하고, 입장이 어떤가와 상관없이 마오쩌뚱이 그들의 성장 초기에 깊이 침투하여 내재화된 영향은 소홀히 할 수 없다”면서, 이들 중에는 “‘작은 마오쩌둥’이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오쩌뚱 시대의 시진핑 시진핑은 1953년생입니다. 1942년생인 후진타오나 1926년생인 장쩌민과 달리 사회주의 중국이 수립된 1949년 이후에 출생한, 이른바 ‘신중국’ 이후 출생한 첫 최고지도자입니다. 이 무렵 출생한 세대는 대부분 홍위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시작된 1966년에 13살이었던 시진핑은 문혁 때 홍위병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문혁 초기에는 주로 혁명 간부나 군인의 자제 등, 출신배경이 좋은 집 아이들이 주동이 되어 홍위병이 됩니다. 이른바 혁명가문의 자녀들이 홍위병이 된 이유는 복합적입니다. 우선, 자기 부모가 피를 흘리며 이룩한 사회주의 공화국이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순수했던 혁명가들이 점점 관료주의자로 타락해가고 부패가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구나 전 중국을 동원하여 빠르게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벌인 대약진운동(1958~1960)이 실패한 데다 가공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수천만 명이 죽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공산당의 통치가 흔들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무렵 나라 밖에서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내우외환의 상황 속에서 중국 사회주의는 위기에 처했고, 다시 중국이 자본주의나 봉건주의 사회로 되돌아가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 우려는 원래 마오쩌뚱의 우려였는데, 마오쩌뚱이 이 우려를 청년세대에게 전달하자, 청년들이 그 우려를 해소할 주인공을 자임하면서 혁명 가문의 출신 중심으로 붉은 이념을 수호하기 위한 홍위병이 되어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문혁이 시작되던 때, 시진핑은 원로 혁명가였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때문에 반동집안의 자식으로 몰려서 홍위병이 될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시중쉰은 1962년 10월 반당(反黨)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됩니다. 1965년에는 뤄양(洛陽)의 한 기계공장으로 쫓겨납니다. 시진핑은 자랑스러운 혁명 간부의 후손에서 부끄러운 반당분자의 아들로 추락합니다. 홍위병조차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화대혁명기 홍위병들 그런데 시진핑은 홍위병으로서 마오쩌뚱의 학생은 되지 못하였지만, 다른 형식으로 마오쩌뚱의 학생이 됩니다. 15세이던 1969년에 ‘지식청년’(知識靑年, 약칭 지청)으로 산시 성의 산골로 가게 됩니다. 문혁 초기, 홍위병이 된 중·고등학생, 대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마오쩌뚱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서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나섭니다. 많은 교사와 학자, 지식인, 국가 지도자들이 자본주의 우파나 봉건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비판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공자 무덤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통 역사유적도 봉건주의를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파괴됩니다. 중국은 무법천지가 됩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되고, 학교와 직장, 공장도 문을 닫게 됩니다. 더구나 홍위병이 여러 파벌로 나뉘고 이들 파벌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자 마오쩌뚱과 중국공산당은 수습책을 생각하게 되고, 그 수습책 가운데 하나가 청년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오쩌뚱은 1968년 12월 22일《인민일보》에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가서 빈농에게 재교육을 받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이를 본 시진핑은 바로 학교에 가서 신청을 합니다. 이때 홍위병을 포함하여 3,000만 명의 도시 학생들이 농촌으로, 산골로 떠나게 됩니다. 이른바 지식청년들이 산으로 가고 시골로 가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은 195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문혁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시진핑은 바로 이 대열에 끼어 부친의 고향인 산시의 오지 산골 마을로 가게 되고, 여기서 7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합니다. ‘반동의 자식’이라는 불명예를 짊어지고서 농촌으로 가서, 벼룩 떼 속에서 잠을 자고 거친 잡곡을 먹으면서 농사일을 합니다. 농민과 하나가 되어 농민에게서 배우고 재교육을 받아야 진정한 지식인이 된다는 마오쩌뚱의 가르침을 누구보다도 충실히 따르는 마오쩌뚱의 모범 학생이 된 것입니다. 지식청년세대 시진핑의 등장 시진핑은 마오쩌둥 시대의 ‘지식청년세대’(이하 지청)입니다. 물론 지청 가운데 시진핑처럼 홍위병 경험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지청 대부분은 홍위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그냥 홍위병 세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012년에 시진핑과 함께 중국공산당 18기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25명의 평균 연령이 62세였습니다. 2명을 제외하고는 사회주의 중국 수립 직전이나 그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로, 시진핑과 거의 동년배였습니다. 마오쩌뚱 시대에 성장하면서 마오쩌뚱의 글을 달달 외우고, 마오쩌둥 찬가를 부르고, 몸소 홍위병이 되어 마오쩌둥 사상을 실천하고, 지식청년이 되어 농촌에 가서 농민과 동고동락한 한 세대인 것입니다. 지식청년으로 산골에서 7년 동안 농민과 동고동락한 시절이 시진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그 시절 경험에 대한 시진핑의 회고입니다. “나에게 가장 큰 수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무엇이 현실이고, 실사구시가 무엇이며, 대중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둘째는 자신감을 키운 것이다. 속담에 칼은 돌에 갈고, 사람은 고난에 단련된다는 말이 있다. 고난이 한 사람의 의지를 단련시키기에 충분했다.” 시진핑처럼 농촌으로 내려가 갖은 고생을 한 3천만 중국 청년들이 모두 시진핑처럼 그 고생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그 시절이 자신을 단련시켜서 오늘의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절을 끔찍하게 기억하기도 합니다. 이념 속에서 그리던 사회주의 이상향과 비극적인 중국 현실을 비교하는 기회가 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개혁개방 이후 자유주의자로 변신하는 사상적 전향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자유주의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 홍위병 출신이 꽤 많은데, 이 사람들은 홍위병 활동을 하고 나중에는 지식청년으로 농촌의 현실을 직접 목도한 뒤, 사회주의를 포기하고서 자유주의 길에서, 서구의 길에서 출구를 찾은 것입니다. 한국에서 과거 한때 대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을 하던 사람이 지금은 시장주의자나 극우 성향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과 비슷한 전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지식청년 시절 기억과 비교하자면, 시진핑은 7년 동안의 농촌 체험을 통해 한편으로는 이념의 재앙을 보면서도 이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이념을 재구성하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삶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시기였습니다. 마오쩌뚱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보면서도 마오쩌둥의 정신을 버리지는 않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시진핑이 주석이 되고 나서 자주 강조하는 대중노선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래 대중노선(‘群衆路線’)은 마오쩌뚱이 가장 중시했던 것이자 중국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 핵심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인민대중을 중심에 두고서 그들의 현실과 삶, 이익을 중심에 두고서 사고하고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오쩌뚱의 정신을 다시 시진핑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진핑이 집권 이후 강력하게 추진하는 반부패 정책과 친서민 행보를 두고서 이는 시진핑이 7년 동안 농촌에서 농민과 하나가 되었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중국을 일으킨 마오쩌둥, 강한 중국을 만든 시진핑 그런데 이런 시진핑의 친서민 정책이나 대중노선과 더불어 중국인들이 마음속에서 마오쩌둥과 시진핑을 나란히 세우는 중요한 이유가 더 있습니다. 어쩌면 중국인에 따라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을 미국에 맞서는 세계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마오쩌둥과 시진핑을 동시에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중국인을 만나서 마오쩌뚱, 덩샤오핑, 시진핑을 비교하여 평가해달라고 하면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마오쩌뚱은 중국을 일으켰고(‘把中國站起來’), 덩샤오핑은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었고(‘把中國富起來’), 시진핑은 중국을 강하게 만들었다(‘把中國强起來’).” 여기에 중국 사람들이 시진핑을 마오쩌뚱과 나란히 세우는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중국인에게 마오쩌뚱은 서구에게 침략당한 굴욕을 청산하고 중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맞서면서 중국의 자존심을 세운 지도자입니다. 더구나 구소련과 대립할 때는 소련을 사회주의를 배반한 수정주의 국가로 치부하면서 세계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자부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중국인에게 마오쩌뚱은 무엇보다도 민족영웅입니다. 이제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G2가 되는 등, 바야흐로 중국 국력이 상승하고 있는 지금, 시진핑이 마오쩌뚱을 이어 새로운 민족영웅으로 중국인 가슴에 새겨지고 있습니다. 시진핑이 집권 이후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은 ‘중화민족 중흥’, ‘중화민족 부흥’입니다. 중국이 전통시대처럼 세계 중심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서는 미국 등 서구 국가의 길을 무조건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자신의 길을 가야하고, 중국 가치(Chinese Value)와 중국 문화, 중국 고유의 제도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과거 마오쩌둥은 반쪽의 민족영웅이었습니다. 중국을 외국의 침략에서 구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는 했지만,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진핑은 지금 중국을 부유하면서도 강한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중국 가치와 중국 문화, 중국 고유의 제도를 바탕으로 한 중국의 길을 가면서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마오쩌뚱에 이어서 ‘시 따따’ 찬양가를 만들고, 노래 부르는 배경입니다. 외국에서는 시진핑 우상화라고 비판을 하더라도 지금 중국의 민심 차원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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