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숙의 시각> 우리는‘여기까지’인가

foto-thailandia동남아시아‘잠룡’태국에서 70년 이상 재위했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최근 서거했다. 그의 생전에 방콕 택시 기사들은 룸미러에 국왕 사진을 걸어놓곤 했다. 사고 나지 않게 살펴 주십사 하고. 가게에 들어가면 큼직한 그의 초상화가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상인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푸미폰 국왕은 국민의 사랑과 추앙을 받았다.
쿠데타가 잦아 정치가 안정되지 못한 태국에서 푸미폰 국왕의 부재는 정치와 사회 불안 가능성을 뜻한다. 지금 태국 정계는 왕실, 군부, 관료, 재벌 등 전통적 기득권 세력과 탁신 친나왓 전 총리로 상징되는 신흥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 탁신계는 서민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 노동자·농민 표를 업고, 약간의 공백기가 있었으나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집권했다. 신 세력이 정권을 10년 이상 장악하자 구 기득권 세력은 2014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계를 밀어냈다.

쿠데타 세력은 내년에 총선을 실시해 민정 이양한다고 발표했는데 일정표대로 될지 알 수 없다. 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크고, 개방됐으며, 지역 외교를 주도한다. 관광대국이어서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한국인들도 군부독재인지, 쿠데타가 잦은지, 군주 국가인지 모른 채 볼거리, 즐길 거리 많은 자유로운 나라로 알고 방문했다가 의외로 정정이 불안하고 국민 권리가 제한돼 있다는 걸 알고 놀란다. 태국은 민주주의가 자라다 청소년기쯤에 성장을 멈춘 나라이지 싶다.
전통적 기득권 세력은 민주주의가 진전돼 국민 대중의 권리와 세력이 커져 자신들의 이해를 침해한다 싶으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 군부가 통치하게 한다. 부패 일소나 국가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국민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총칼로 억압한다. 국민이 군부에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도록 일정 기간이 지나면 민간 정부에 권력을 넘겨준다. 다시 정부나 국민 권리가 확대돼 기득권을 위협한다 싶으면 또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일어난 쿠데타가 푸미폰 국왕 재위 70년 동안 19번이다.

경찰 공무원에서 통신 재벌로 성공한 탁신 전 총리 진영은 저소득층으로부터 받은 지지를 무기로 이권을 독식하려다 군부 쿠데타를 두 번이나 당하고 축출됐다. 그가 등장한 뒤 태국은 반 탁신과 친 탁신으로 나뉘었다. 구 권력과 신 권력으로 양분돼 정쟁으로 날을 지새웠고 결코 융합할 수 없는 물과 기름이 됐다. 두 진영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권력 구도를 만들기 위해 법과 제도를 이리저리 뜯어고쳤다. 탁신 진영은 부정부패 혐의를 받았지만,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의 지지를 얻어 2000년 이후 총선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구 기득권층은 선거로는 집권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투표권을 교육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물론 요즘은 군부 통치 시대라 탁신계는 납작 엎드려 있다.

두 세력이 충돌한 결과 90여 명이 숨지고, 1천700여 명이 다친 사건이 2010년 방콕 대시위다. 민주주의에 젖어 사는 서구인들은 구 기득권층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 되고, 그러려면 대중을 위한 정치와 정책을 펴면 되는데 구 세력은 왜 그렇게 하지 않고, 무력으로 국민의 민주주의 욕구를 억압하려고만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이는 기득권층이 민생에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과 안위를 최우선시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왕실과 귀족이 존재하는 국가의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동남아에는 이런 군부독재나 족벌 정치의 잔재가 많다. 인구가 12억 명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일컬어지는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사회 발전의 최대 걸림돌로 지적된다. 두뇌가 명석한 인도인들은 미국, 유럽 등 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하고도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례가 많다. 귀족과 부자에겐 인도가 살기 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층 계급이 궂은일을 맡아 하고, 상위 계층을 떠받들기에.
구 세력은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고, 탁신계는 부정부패와 치부를 당연시하기 때문에 태국 국민은 불행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정치 지도자를 만나는 복이 없는 것이다. 미국 외교 전문지‘포린폴리시’가 선정한 세계 100대 지성인인 키쇼어 마부바니 싱가포르국립대학교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학장은“태국은 국가보다 정치적, 분파적 이익을 앞세우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고, 그 골이 너무 깊다”고 지적했다. 국민이 선거로 출범시킨 탁신계 정부를 군부가 두 번이나 무너뜨리자 그는 태국에서는 이제 선거조차 작동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한국은 어떤가. 이른바 보수,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분열의 뿌리가 깊고, 해소 전망은 남북대치 상황 등으로 인해 어둡다. 두 진영의 정책이나 입장을 보면 양쪽을 가르는 것이 이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둘 다 중도쯤이라고 보면 맞지 않을까. 그런데도 맨날 대치하거나 싸운다. 보수·진보, 좌·우파라기보다 권력을 중간에 놓고 갈라진 내 편·네 편, 이쪽·저쪽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정책 토론은 거의 없고, 싸움은 5년 주기 대선 때마다 지역감정,‘색깔’이 덧씌워져 이전투구가 된다. 정치권이 편 가르기와 권력 다툼에 골몰한 동안 우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기존 성장 동력은 식어가는데 앞으로 뭐로 먹고 살지 막연하다. 한국의 정치 분열로 인한 위기는 결코 태국보다 낙관적이지 않다.

마부바니 학장은 한국에 대해서도‘아시아의 용’이었으나 정치적 교착 상태에 빠져, 되는 일이 없다고 개탄했다. 우리에겐 자원, 기술, 자본 등 발전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산이 별로 없다. 정치가 업그레이드된다면 사회가 도약할 여지가 큰데, 날고 긴다는 정치 고수들이 이것을 하지 않으니 국민은 답답하다. 한국 발전의 열쇠는 소통, 배려, 협력, 우정, 가족애를 만연하게 하는 데 있지 않을까. 먹고 사는데 바빠 이런 가치들을 간과했고,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그것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통은‘듣기 싫은 말을 들어주는 것’ 이라고 한다. 소통에는 배려, 협력, 우정, 사랑이 전제돼 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우리의 성공은‘여기까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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