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과 광장

201207271343384387364“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어느 노랫말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놀이는 마당이라는 공동체적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김홍도의 그림을 살펴보면 마당이나 시장의 공터를 중심으로 모여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이 있다.
오늘날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마당이나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오랜만의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지고 각종 소식이 전달되어지곤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시장을 생활무대로 살아가는 보부상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방해하기까지 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마당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명사]
1. 집의 앞이나 뒤에 평평하게 닦아 놓은 땅.
2. 어떤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
[의존명사]
1.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판이나 상황.
2. 판소리나 탈춤 따위의 단락을 세는 단위.

img_5561생산의 공간이자 상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많이 회자되는 곳이 광화문이다. ‘광화문 광장’으로 불리는 곳이 과거 서울 도심의 대로였다면 오늘날은 만남의 공간이자 의사 표현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서양에서 광장은 그리스 Agora에서 시작되어 로마의 Forum, 중세도시의 Place로 계승되어 왔으며, 지금도 도시 공간의 핵심에 위치한다. 광장은 종교, 정치, 사법, 상업, 사교 등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시민들의 사회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때문에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시작과 끝이 광장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시민의 편의를 위해서 특별하게 조성된 광장이 없었다. 단지 넓은 공터와 길이 광장의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도시에는 길은 있으되 광장은 없었다고 말해질 정도다. 하지만 형태와 기능은 달랐지만, 광장은 우리 조상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청동기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마을을 만들고 함께 농사를 지으며 고인돌을 만드는 등 공동 작업을 함께 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마을 공동의 행사를 통해 서로간의 일체감과 소속감을 고취시키고, 내부 갈등과 이웃 간의 분쟁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행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이 필요했다.

삼국시대 초기의 광장은 공동 노동이 이루어지는 곳,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즐기는 곳,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리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왕권이 강해지면서, 광장의 역할은 줄어들었다. 왕은 자신의 권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차츰 백성들로부터 멀어졌다. 왕이 상대해야 할 사람은 귀족에 한정되었고, 백성들은 지배의 대상일 뿐 그들의 소리 하나 하나에 주목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왕이 사는 도성을 건설하는 데 있어 더 이상 광장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할 공간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 왕경도”나 당나라 장안의 모습을 살펴보아도 대로가 중심이지 광장을 조성한 흔적은 찾기 힘들다. 다만 오늘날의 광화문광장 같은 도로가 변형되어 광장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광장은 임금이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법질서의 준수를 강조하는 곳이기도 했다. 대궐 문에는 ‘상위(象魏)’라고 하여 법조문을 내걸어 두는 관례(慣例)가 있었다. 이는 백성들이 법을 몰라 죄를 위반하는 경우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각종 법령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 방(榜)을 내걸어 알리기도 했다. 반면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주는 것을 사람들이 지켜보도록 하기 위해서 궁문 앞에서 매를 치기도 했다.

이처럼 광장은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고,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광장이 대화와 토론의 마당이자 화합의 장소로서 기능하여, 도시 생활의 중심으로 고대 민주사회를 건설하는 터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부터, 광장이 대화와 토론 마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권력자는 대중에게 공연이나 축제를 보여주거나, 자신의 권위를 내보이는 장소로 광장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광장은 무력을 가진 자의 투쟁의 장소였고, 제한된 신분을 가진 자들만 자신의 의견을 권력자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뿐, 일반 대중들의 의견이 소통되는 공간은 되지 못했다. 광장에서 민중의 정치적 요구가 제대로 모아진 적도 없었다. 1898년 종로 거리 광장에서 열린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가 처음으로 민의(民意)가 모아진 사례로 언급될 수 있는 정도였다.

20세기 후반 우리 역사에서는 광장 문화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71년 12만평 규모로 여의도에 만들어진 5.16광장은 100만 명을 동원해 행사를 치룰 수 있는 거대한 광장으로, 권력자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탄생했다. 이후 서양의 도시를 본 따 새롭게 만들어진 도시마다 광장이 조성되었다. 대중들이 광장에 모여 정치적 요구를 밝히면 정부에서는 이를 막는 것에 급급해 광장 사용을 원천 봉쇄하기도 했다. 이제는 광장을 매개로 하여 전 국민이 함께 하고 있다. 민의를 모아 하나 된 소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시대 마을 풍경], 2010;최종규, [광장에 대한 인식], [역사교육논집] 13-14집, 1990;이도학, [고구려의 내분과 내전], [고구려연구] 24집, 2006;장태현, [중국광장의 형성과 변천과정에서의 현상], [산업과학연구] 21-2호, 청주대학교, 2004;주종원, [도시공간요소로서의 광장], [도시문제] 12-4, 1977;안설, [광장문화에 대한 담론연구], 서강대 석사논문, 2007. 김용만의 글.

Ⅰ글Ⅰ 공 일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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