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탄을 훔친 사나이 (上)

세미팔란티스크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동북에 있는 외딴곳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요새로 건설된 이후 서시베리아로 통하는 교역 중심지였던 이곳에 1949년 초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술진이 몰려들었다.

소련에 원자폭탄 설계도를 넘긴 영국의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의 젊은 시절[위키피디아 제공]

소련에 원자폭탄 설계도를 넘긴 영국의 스파이 클라우스 푹스의 젊은 시절[위키피디아 제공]

이들은 황량한 이곳에 건물, 교량, 창고 등을 잇따라 건설하기 시작했다. 외양간과 마구간에는 소와 말들이 채워졌다. 주민들은 영문을 몰랐지만, 굳이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비밀경찰이 주민들의 동태 감시에 집중하는 마당에 당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 한마디라도 하면 목숨을 잃거나 살아서 나오기 어려운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궁금증은 곧 해소됐다. 같은 해 8월 29일 처음 들어보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버섯구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첫 번째 번개’라는 별명을 가진 옛 소련의 RSD-1 원자폭탄 폭발 시험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폭발력은 태평양전쟁 막바지던 1945년 8월 1일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패트맨)과 같은 TNT 기준 2만 2천t이었다. 특히 최고 권력자 스탈린에 이어 2인자로 비밀경찰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아의 지시로 모양도 ‘패트맨’을 그대로 모방했다.

미국이 소련의 첫 원폭 실험 사실을 안 것은 같은 해 9월 3일이었다.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 비행 중이던 미국의 첩보기는 핵실험 증거를 찾아내 보고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 행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소련이 원폭을 보유하려면 몇 년이 더 흘러야 할 것이라고 예측을 해온 트루먼 행정부의 충격과 분노는 엄청났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은 같은 달 말 대국민담화를 통해 소련의 원폭 실험과 보유 사실을 발표했다.

미국민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클라우스 푹스라는 독일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가 미국 원폭 설계도를 훔쳐내 소련에 넘긴 혐의로 체포돼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푹스의 간첩 행위는 더는 핵무기를 독점 보유하지 못하게 된 미국으로 하여금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또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을 겪던 영국을 위해 미국이 원폭을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철회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부친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붉은 여우’

에밀 율리우수 클라우스 푹스라는 긴 본명을 가진 푹스는 1911년 독일에서 루테란교회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를 포함해 가족 대부분이 열렬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상 푹스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좌파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런 그에게 친구들은‘붉은 여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9살 때 그는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했지만, 킬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긴 아버지를 따라 전학했다. 킬 대학에서 그는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1949년 8월에 시행된 소련의 첫 원폭 시험 장면[위키피디아 제공]

1949년 8월에 시행된 소련의 첫 원폭 시험 장면[위키피디아 제공]

곧이어 푹스는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해 본격적인 좌파 지식인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SPD의 강령에 불만을 품고 가족과 함께 독일공산당(KPD)으로 당을 옮겼다. 아돌프 히틀러가 최고 실권자로 부상한 1933년 초 푹스는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연구소에 적을 두고 이미 잘 알려진 청년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권좌에 오른 히틀러는 먼저 공산당 탄압에 나섰다. 출세가도를 달리던 청년 공산당원인 자신도 이런 탄압 폭풍을 비켜갈 수 없다고 판단한 푹스는 1933년 9월 가족을 놓아둔 채 혼자 영국으로 도피했다.

푹스는 이전 반(反) 파시스트회의에서 만난 영국인 부부의 도움으로 브리스톨대학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브리스톨대학 재정에 큰 도움을 준 이 부부는 그에게 특히 네빌 F 모트 물리학과 교수의 연구조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모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푹스는 3년 뒤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영국에는 나치의 학정을 피해 이주한 유대계 등 독일인들로 북적댔다.
이 과정에서 푹스는 에든버러대학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 영국 국적을 신청했다. 그러나 국적 신청 직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영국 정부는 독일인 등 영국에 거주하는 적성 국민이 간첩활동이나 파괴 활동 등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인 등에 대해 철저한 신원조회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푹스는 주위의 도움으로 풀려날 때까지 브리튼제도의 맨섬과 캐나다 퀘벡에서 감금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푹스는 연구 생활을 하면서 망명 공산주의자들과의 토론회 등을 통해 공산주의에 더욱 심취하기 시작했다.

‘튜브 합금 프로젝트’에 참가

연구와 공산주의 사상 토론회 등 단조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푹스에게 1941년 5월경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같은 독일계로 버밍햄대학에서 핵물리학을 연구하던 루돌프 파이어스 박사의 추천으로 ‘튜브 합금’(tube alloy) 프로젝트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영국이 비밀리에 착수한 원폭 개발 계획이었다. 그는 파이어스 교수 부부와 한 집에 기거하면서 동위원소 분리 등 기초 연구에 전념했다. 이를 눈겨여본 영국 정부는 기밀을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그에게 영국 국적을 부여했다.

푹스가 이념의 고향인 소련을 위해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연합뉴스 | 김선한 기자 | shkim@yna.co.kr]

Related articles

19일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한 이사장은 다음 주 초 재외동포재단의 9대 이사장으로 취임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내정자는 미국에 거주 중이지만 곧 한국에 도착할 예정이다. 재외동포 출신이 재단 수장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단 이사장은 외교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3년이다. 서울 출신인 그는 1987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했다. 1988년 미주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미국 소수계 언론 연합인 뉴아메리카미디어 부장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문제를 다룬 30여 회의 시리즈를 미주한국일보에 게재해, 2001년 한국기자상 특별상을 비롯해 AP통신 기자상, 미국 내 비영어권미디어 최초 소수계 기자상을 받았고 퓰리처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징용 및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국제변호인단을 조직해 일본 정부와 일본회사를 상대로 1999∼2006년 대일소송을 이끌기도 했다. 미주 한인 2세로 제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의 영웅이자 인도주의자로 이름을 떨친 고 김영옥 대령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9년 LA 공립학교의 ‘김영옥중학교’ 명명을 주도했고, UC리버사이드대 부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와 국내 김영옥평화센터 설립에 앞장섰다. 김영옥의 전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과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등의 저서가 있다.

Leave a Reply

avatar
  Subscribe  
Notify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