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시대의 아픔, 노천명 6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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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노천명의 1951년 작 ‘고별’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 시구는 노천명의 묘비 대신 무덤 앞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져 있다. ‘고별’은 노천명이 한국전쟁 중 부역죄로 수감돼 옥중에서 쓴 옥중시 중 한 편으로, 시집 ‘별을 쳐다보며’에 실렸다.
16일은 노천명이 46세로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노천명은 1957년 2월 7일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져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 다소 회복하자 치료비 부담으로 퇴원했다가 넉 달 만에 6월 16일 자택에서 운명했다. 장례는 명동성당 별관인 천주교 문화회관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서울 중곡동 천주교묘지에 안치했다가 후에 서울시 확장으로 이 묘지가 옮기게 되어 경기도 고양시 벽제면 대자리 소재 천주교묘지로 이장했다. 두 달 후 8월 23일 이 시비가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 시대를 산 사람들 모두의 인생에 강한 흔적을 남겼다. 노천명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노천명은 임화, 김사량 등 월북했다가 내려온 좌파 작가들을 만나 이들이 주도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행사에 참여했다. 서울 수복 후 부역죄로 체포되어 1950년 10월 20일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노천명은 1951년 4월 4일 사면을 받아 투옥된 지 6개월 만에 출감했다. 그는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었다’를 발표했다.
노천명은 당국의 특별 배려로 옥중에서도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억울함과 자조감을 표현했다. 1953년 펴낸 제3 시집 ‘별을 쳐다보며’에는 40편이 수록돼있는데 이 중 21편이 옥중시이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로 시작하는 그의 대표작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도 수감 중에 쓴 작품이다.
친일문학을 다룰 때 이광수와 더불어 노천명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194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태평양전쟁을 찬양하는 친일작품을 다수 남겼다.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제2 시집 ‘창변’을 간행했다. 이 시집의 말미에는 ‘흰 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학병’ 등 친일시 9편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출판한 지 얼마 안 돼 해방이 되자 노천명은 이 시집에서 친일시 부분을 뜯어내고 그대로 계속 판매했다. 지금까지 알려진‘창변’이 바로 그것이다.
1943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예부 기자로 들어간 노천명은 기사와는 별도로 여러 편의 친일시를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조선인 청년들의 전쟁 참여를 촉구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1943.8.5), 조선인 출신으로 가미카제 특공대에 나가 최초로 전사한 마쓰이 오장을 노래한 ‘신익-마쓰이 오장 영전에’(1944.12.6), 태평양전쟁 3돌 기념 특집호에 가미카제로 희생된 군인들의 사진 아래 실린 ‘군신송’(1944.12) 등이 대표적이다. 매일신보 외에도 ‘병정’(조광. 1944.5), ‘천인침’(춘추. 1944.10) 등의 시와 후방(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촉구한 글
‘싸움하는 여성’(조광. 1944.10) 등을 발표했다.
그는 1939년 황국위문사절단 단원으로 중국 화베이 지역을 순회했으며 1941년 10월 조직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 이듬해 1월 만들어진 산하기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의 간사를 맡아 근로 봉사, 군복 수리운동 등을 펼쳤다. 노천명은 1942년 모윤숙, 최정희 등과 일제의 어용 문인단체 조선문인협회에도 가입했다.
노천명은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원래 이름은 기선이었으나 6세에 홍역을 앓아 사경을 헤맨 뒤 천명으로 살아났다고 해서 천명으로 개명했다. 9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화여전 영문과 재학 중 ‘신동아’에 ‘밤의 찬미,’ ‘포구의 밤’(1932년 6월호)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1935년 ‘시원’의 동인으로, 창간호에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했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안톤 체호프의
‘앵화원’에 출연하기도 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잡지 ‘여성’에 들어갔다. ‘여성’에 재직 중이던 1938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하는 대표작 ‘사슴’을 비롯하여 ‘자화상,’ ‘연잣간’ 등 1937년까지 쓴 시 49편을 모아 처녀 시집 ‘산호림’을 출간했다.
그는 1941년 ‘여성’을 그만둔 뒤 1943년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2년간 문화부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매일신보가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었고 노천명은 문화부에서 계속 일했다. 1946년 서울신문을 떠나 부녀신문 편집차장으로 1년간 일했다. 노천명은 1947년 부녀신문을 끝으로 신문기자 생활을 마감했다. 부역 혐의로 수감됐다가 석방된 후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공보실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를 시작해 6년 동안 일했다. 신문사 경력 15년에 중앙방송국에서 일한 기간을 더하면 언론계 경력이 21년이나 된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현 중앙대학교)에 출강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 근무하며 ‘이화 70년사’를 집필했다. 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졌다.
노천명의 유고시집이자 제4 시집 ‘사슴의 노래’는 1958년 6월 15일 사후 1년 만에 간행됐다. ‘사슴의 노래,’ ‘유월의 언덕,’
‘나에게 레몬을’ 등의 유고와 앞선 시집에서 수록되지 않은 시들이 실렸다. 산문으로는 수필집 ‘산딸기’(1948년), ‘나의 생활백서’(1954), ‘여성서간문독본’(1955) 등이 있다.
노천명은 성격이 내성적인 데다 자존심, 고집이 세고 비타협적이었다고 한다. 흔히 노천명을 ‘사슴의 시인’이라고 부른다.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만의 목소리를 냈다. 고독하면서도 화려한 이미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풍물시들을 남겼다. 당시 여성 작가들은 작품보다는 ‘여류’라는 점을 내세운 경우가 많았는데 노천명은 여성 작가가 작품의 수준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험난한 시기를 지나면서 친일 행적과 부역 행위라는 오점을 남겼다.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밖에 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뛰어난 문재와 풍부한 감성으로 아름다운 시만 써도 부족했을 시인이 시대에 휘둘려 이러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픈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만 들다”로 시작하는 그의 시 ‘6월의 언덕’에서처럼 아름다운 6월, 마음을 접은 채 세상을 떠난 노천명을 기억하며 시대의 아픔을 되새겨본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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