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갖고 튀어라

동네 한심한 백수는 동원 예비군에 대신 나가주는 대가로 용돈을 받아 생활한다. 그날도 친구가 3박4일 예비군 훈련을 대신해준 대가로 5만원을 통장에 입금해주겠다고 해서 은행을 찾았더랬다.
평소 사용할 일이 없었던 통장을 겨우 찾아내 은행 통장정리기에 넣은 그 순간, 백수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친구가 보낸 5만원과 함께 100억원이라는 돈이 찍힌 것이다. 100억원을 본 백수는 어떻게 했을까. 자기 돈도 아니면서 누가 훔쳐갈세라 3억원을 우선 ‘잽싸게’ 인출했다.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1995)의 내용이다.
물론 백수의 통장에 들어온 100억 원은 ‘사고’였다. 그러나 은행직원의 실수는 아니었고, 어떤 ‘조직’이 비자금을 세탁하는 과정에서 1년 이상 휴면 계좌를 선별해 잠깐 사용하려다 벌어진 일이다. 사고 친 쪽이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어 동네 백수는 말 그대로 횡재했다. 그래도 바보는 아니어서, 비정상적인 돈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백수는 돈을 갖고 바로 튀었고, 조직은 킬러를 고용해 그를 쫓는다.
웃자고 만든 코미디다. 무려 23년 전에 나온. 그런데 인공지능이라느니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한다느니 하는 이 시대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사고 친 이들은 한심한 백수가 아니고, 검은 조직도 아니다. 알 만큼 알고, 배울 만큼 배운 선망받는 화이트칼라 엘리트들이다.
일반인들은 도대체 얼마인지 가늠도 할 수 없는 112조 원에 해당되는 주식을 단 한명의 증권사 직원이 컴퓨터 입력 실수로 나눠준 것도 어이가 없는데, 그걸 또 잽싸게 팔아치운 같은 증권사 직원이 16명에 달한단다. 만우절 가짜뉴스가 아니다. 자기 통장에 찍힌 주식 숫자가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증권 전문가들이다. 자기 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누가 다시 가져갈까 봐 잽싸게 행동했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즉각 엄청난 금액의 주식을 내다 판 그 호방한 배포와 미니멀한 사고와 초일류 이기심 앞에 주눅이 팍 든다.
하긴 뭐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수백억대 뇌물과 횡령 혐의로 구속되는 나라에서 도덕적 해이가 어쩌고, 점유이탈물횡령죄가 어쩌고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일지 모른다. 대통령 등 위에 올라타 대기업들을 자기 발아래 호령했던 어떤 인사가 여전히 반성도 안 하고 있는데 오죽할까도 싶다.
그래도 코미디 영화에 그쳤어야 했다. 패러디하고 비틀고 풍자하는 선에서 끝났어야 했다. 아무리 기댈 것은 로또뿐이고, 너도나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세상이라지만 화이트칼라들이 대명천지 뻔히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한몫 챙기려 했다는 게 실화라니. 코미디는 더 분발해야겠다.
[연합뉴스 = 윤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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