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0일 완전한 통일의 그 날

4월 30일은 베트남의 국가 휴일인 남부 해방 기념일이다. 이제는 노동절과 이어지는 구정을 제외한 가장 긴 연휴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만, 40여 년 전 그 날은 끊임없던 베트남 전쟁의 마침표를 찍기 위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전쟁을 버텨온 베트남 군인들과 난민들, 또 잊어서는 안 되는 파병 한국군인들, 그 모든 이들의 희생과 아픔이 현재 베트남의 역동적인 발전과 성장의 젖줄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호찌민 운동의 ‘총공격(General Assault)’은 사이공 정부를 타도하고 통일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남부 해방 기념일은 베트남인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민족해방과 남북통일을 이룩한 베트남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이정표이자 가장 소중한 날이다. 1975년 5월 1일에는 남부와 북부를 아우르는 베트남의 모든 노동자와 시민들은 완전하게 자유로운 국가에서 노동절을 마음껏 축하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베트남은 통일국가로 지속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끊임없는 전쟁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은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와의 기나긴 전쟁을 시작 하였다.
1964년 8월 7일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북베트남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이후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하여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 되었으며, 미국이 군사개입범위를 넓히면서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애초에 정당한 명분 없이 시작된 전쟁은 예상과 달리 북베트남의 강력한 저항으로 지지부진해졌고, 이에 국제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전쟁의 주역인 미국을 질타하게 된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 파견을 시작으로 30만 명이 넘는 전투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 과정에서 1만 6천여 명의 청년들이 사망했으며, 살아 돌아온 사람들조차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고엽제의 후유증에 신음하고 있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해방을 위한 국민전선은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에 남부를 공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넘기고 간 최신병기로 무장한 110만의 병력과 세계 4위의 공군력을 자랑하던 남베트남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군율과 기강, 남베트남 지도부의 부정부패는 전력의 격차를 무색하게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4월 27일 ‘아메리칸 라디오’에는 베트남에서 모든 미국인들은 철수하라는 신호의 방송이 나왔고 미국인들과 국외 탈출을 시도하려는 베트남인들이 뒤엉켜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들었다.
4월 29일 미국 대사관의 옥상에서는 철수하는 미국인들을 실은 헬리콥터의 문이 닫혔다.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 떠오르고 있는 수송헬기의 문에 달라붙어 절규한다. 담장 밖에서 베트남인들이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오려고 몸부림을 쳤고, 당시 경비를 서던 미 해병대원들은 가차 없이 곤봉을 휘두르고 최루탄을 던져 그들을 저지했다. 이것이 미국과 남베트남의 30년 혈맹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30일 새벽 3시 45분, 미국의 마틴 대사는 성조기를 접어들고 헬기로 대사관 건물을 떠났다. 해방전선기를 매단 북베트남 전차 여단이 사이공 교외의 다리를 건너 독립궁을 접수하기 불과 2시간 30분 전의 일이었다.
그날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에게 독립궁이 넘어가기 한 시간 전부터 라디오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즈엉반민’ 남베트남 대통령의 담담한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본인은 베트남군 총사령관으로 전군에게 현 위치에서 정지하고 발포를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이로써 1858년 프랑스군이 무력으로 다낭을 점령한 지 117년 만에 베트남인들은 프랑스와 미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통일을 이룬다. 이것으로 길고 긴 베트남 전쟁 30년의 역사가 끝을 맺었다. 이는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들과 벌였던 길고 고통스러운 무력투쟁에서 베트남 혁명가들과 인민들이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그 속에서 한줌의 안남미와 소금으로 겨우 연명하며 투쟁해온 남부해방군, 그들은 속옷조차 없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어 군화로 대신하면서 지긋 지긋했던 남북 간의 긴 전쟁의 마침표를 찍고 해방군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사이공’이라는 옛 이름을 대신해 베트남 독립투쟁을 이끈 영웅의 이름을 딴 ‘호찌민’시가 탄생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사이공 정부군 11만 명이 전사하고 49만 9천명이 부상당했으며, 민간인도 41만 5천명이 사망했다. 하노이 정부 역시 1975년 정부군과 해방군 110만여 명이 사망하고 60만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해방의 대가는 엄청났다.
그렇기에 더욱더 베트남 전쟁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토록 오랜 시간 제국열강들로부터 자국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과 정신력으로 싸웠던 그 자그마한 체구의 베트남군인들, 그리고 피 흘린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희생과 부끄러운 가해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기에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남부 해방 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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