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 비폭력 노선에서 무장투쟁 초석된 3·1운동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중략)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으로 맥진(驀進·힘차게 나아감)할 따름인뎌.”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읽은 기미 독립선언서에는 10년 가까이 일제에 억눌린 조선 민족이 정당한 권리를 되찾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투영됐다. 새로운 세계와 도의의 시대가 펼쳐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겼다.
거사 일자를 3월 1일로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해 1월 21일 승하한 고종의 국장이 3월 3일로 예정돼 많은 사람이 상경하리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전날인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는 비단 서울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평안도 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와 함경도 원산에서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은 모두 종교계 인사로, 천도교 15명·기독교 16명·불교 2명이었다. 일제는 정치적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해 그나마 유지된 조직이 종교단체였다.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는 2월 27일 독립선언서 2만 1천여 장을 인쇄해 전국 각지에 배포했다. 이틀 뒤 태화관에 결집한 민족대표는 33인 중 29인. 만세삼창을 한 대표들은 경찰에 연행됐으나, 그날 오후 2시 30분 탑골공원에 모인 수많은 사람은 선언식 이후 날이 저물 때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민족대표가 과연 대표성을 지녔는가는 오랜 논쟁거리다. 이들이 탑골공원에 합류하지 않았고 일부가 훗날 독립운동 대오에서 이탈했다는 점을 들어 비판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최대 독립운동인 3·1운동의 초석을 놓은 이들의 역할과 상징성이 부정돼선 안 된다는 것이 주류적 견해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교육’에 게재한 논문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 연대의 힘’에서 “서울을 제외한 6개 도시는 모두 북부 지방으로, 철도역이 있었다”며 “안주를 제외하고는 주로 종교 연대, 종교와 학생 연대를 기반으로 시위를 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첫날 연대에 기반해 일어난 7군데 만세시위는 방식이 동일했다”며 “이러한 방식은 다음날부터 확산해 3·1운동을 상징하는 시위로 자리를 잡았다”고 덧붙였다.
3·1운동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점차 확대돼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절정에 이르렀다.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5월까지 전국에서 1천 500회가 넘는 시위가 열렸고, 참가 인원은 당시 인구의 10%인 202만 명에 달했다. 아울러 만주와 연해주, 미주에서도 조선 독립을 선언하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시위 양상도 다양해 시골 장터 시위는 물론 밤중에 산 위에서 하는 봉화 시위, 동맹휴학, 노동자 파업 등으로 나타났다.
조선총독부는 이 항쟁에 대응해 발포 명령을 내렸고, 폭력적 탄압에 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1919년 3∼6월 사망자가 600명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으나, 박은식은 1919년 3∼5월에 사망 7천509명, 부상 1만 5천 961명이라는 큰 피해를 봤다고 기록했다.
3·1운동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한국근현대사학회가 펴낸 ‘한국 독립운동사 강의’에서 “1910년대까지는 유생과 농민이 중심이 된 복벽주의(조선왕조 복구) 의병과 지식인이 주도한 공화주의 계몽운동이 공존했다”며 “3·1운동을 계기로 복벽주의는 자취를 감췄고, 국내외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표방했다”고 분석했다.
권대웅 전 대경대 교수와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같은 책에서 독립 쟁취 가능성 확인, 독립운동 참여 주체 확대,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론 다양화를 의의로 꼽았다.
또 임시정부 탄생의 씨앗이 됐고, 일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지배 방식을 바꾸는 원인이 됐다.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 1919년 8월 12일 물러나면서 총독에 취임한 해군 출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변경하고 조선인을 관리로 등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학계에서는 3·1운동이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몇 가지 쟁점도 있다. 그 중 하나가 3·1운동이 진정 비폭력적이었느냐는 점이다. 민족대표는 조선이 보유한 무력수단이 없는 현실을 고려해 비폭력 노선을 선택했으나, 시위가 전개되고 일제 탄압이 강력해지면서 조선인이 통치기관을 습격하는 일이 빈발했다. 경기도 수원, 안성, 경상도 함안, 창녕, 평안도 강서 등지에서는 면사무소ㆍ주재소(파출소) 방화, 일본 순사 처단 등 다분히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만세운동이 있었으며 이는 만주와 러시아의 무장투쟁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기도에서는 3·1운동 당시 21개 부와 군 등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3∼4월 2개월간 총 225회의 시위가 전개됐다.
이는 경기도가 남북으로 철도, 도로가 관통하는 요충지이고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지켜본 뒤 고향에서 비슷한 투쟁을 주도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박환 수원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기도 지역의 이 같은 공격적 만세운동에 대한 연구가 미진했던 이유로 “기존의 연구들이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상징되는 ‘탄압과 희생’에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라면서 “경기 남부지역의 정면대결 시위는 만주와 러시아 등 무장투쟁의 전 단계로써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3·1운동기념사업회장인 이정은 박사도 경상도, 경기도(고양) 등지의 만세 시위운동 연구 결과를 인용해 “만세운동 초기에 비폭력 양태를 띄었던 시위들이 일제 통제력이 약하거나 시위대 동원 역량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공세적으로 전환됐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와 이 박사는 공세적 시위로의 전환 배경에 대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격화에 따른 생존권 차원”(이정은 박사), “정당 방위적 성격”(박환 교수)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폭력성을 띤 시위가 벌어진 지역에서도 일본 상인이나 부녀자를 상대로 한 무자비한 보복 살해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정은 박사는 “양성면 주재소 습격 시 순사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해치지는 않았으며, 당시 우편소 소장의 도움으로 산으로 대피하던 일본인 여성들에게도 일절 해코지를 하지 않는 등 절제된 시위 양상을 보인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윤경로 한성대 역사문화학부 명예교수는 “일부 지역의 공세적 시위가 결국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이어졌다”면서도 “그러나 일본 상인이나 부녀자 등을 상대로한 대규모 살상이 없었던 것은 3ㆍ1운동의 평화적 시위 기조를 지키려 애쓴 것으로 평가할만하다”고 말했다.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학술지 ‘정신문화연구’에 게재한 논문 ‘3·1운동에서의 폭력과 그 함의’에서 “3·1운동에서 평화적 시위와 폭력 시위는 6대 4의 비율이었다”며 “3·1운동이 비폭력운동이었다거나 그 기조가 비폭력주의였다는 말은 반쯤 맞고 반은 틀리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독립운동 이후 독립전쟁 준비와 무장투쟁으로 전환됐다고 강조하면서 조선인의 폭력은 현실 속에 제도화된 폭력에 대한 저항이자 반(反)폭력이었다고 덧붙였다.
3·1운동 의의를 논할 때면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약소민족 해방운동에 영향 혹은 자극을 주었다는 주장을 재검토하고, 3·1운동에 대한 개인 서사를 부각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김정인 교수는 논문 ‘3·1운동, 죽음과 희생의 민족서사’에서 “사실과 진상의 규명보다 민족적 죽음과 희생으로부터 반일정서를 확인하고자 했던 문화가 오랫동안 지속했다”며 “제암리 사건이나 유관순 같은 특정 사건과 특정 인물의 죽음과 희생으로 민족서사가 형성되면서 수많은 개인의 서사가 묻혀 버린 점은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임시정부와 비교하면 3·1운동은 연구 성과와 연구자가 적다”며 “국내외에서 발굴되는 사료를 지속해서 분석하고, 각지에서 벌어진 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글_연합뉴스 박성현, 홍덕화, 정리_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