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임정 百주년] 일본에서 프랑스까지 세계로 퍼져나간 3·1운동

3·1 마중물 된 2·8 선언 성지 도쿄
3·1운동이 일어나기 20여일 전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는 세계 역사에서 예를 찾기 힘든 ‘독립선언’이 행해졌다. 식민지시대 피지배국 민중들이 지배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감행한 ‘2·8독립선언’. 조선에서 일본에 건너온 유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외친 이 조선 독립의 함성은 곧이어 조국에서 펼쳐진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유학생은 678명. 독립선언이라는 ‘거사’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그해 1월 6일이었다. 웅변대회 중 독립 열망의 연설이 이어지다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최팔용, 서춘, 백관수등 10명이 실행위원으로 뽑혔다. 이중 1명이 질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이후 이광수 등 2명이 추가돼 실행위원은 11명이 됐다. 선언문은 당시 소설가로 이름을 높였지만 후일 친일파로 변절했던 이광수가 작성했고, 일본어와 영어로도 번역돼 비밀리에 인쇄됐다.
드디어 2월 8일이 되자 선언문은 제국의회 의원, 각국 대사관, 내외신 신문사 앞으로 ‘민족대화 소집 청원서’와 함께 배달됐다. 이어 오후 2시, 선언문이 발표됐다. 당시 유학생들은 어떻게 ‘적(敵)’의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땅에서보다 먼저 독립선언을 외칠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집결 장소가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이었고, 조선보다 일본이 오히려 경찰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당시 도쿄가 서울에 비해 외국의 소식을 접하기 쉬운 ‘국제도시’였던 것도 이곳의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 열망을 달아오르게 한 요인이다.
2·8독립선언문은 3·1독립선언서보다 더 강경하고 투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선언문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한다”면서 독립을 주창했다. 선언문은 이후 3·1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됐고,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3·1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한 2ㆍ8 독립선언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재판 기록 등을 찾지 못해 관련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2·8독립선언의 기록은 대부분 해방 이후 작성된 것들이다. 당시 신문기사나 경찰의 기록은 있지만, 운동에 참여했다 체포된 사람들의 재판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도쿄 내 2·8독립선언의 흔적은 재일본한국YMCA회관 앞에 세워진 2·8독립선언 기념비와 회관 한구석에 있는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 정도다.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불에 탔고, 현재의 도쿄YMCA회관은 도보로 10분가량 떨어진 곳에 새 보금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유학생들이 선언문을 발표한 뒤 밖으로 나와 독립을 외친 히비야공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일왕의 주거지 인근에 위치한 히비야공원은 독립선언 직후인 2월 12일과 24일 각각 100명과 150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히비야 공원 어디에도 2.8독립선언의 현장임을 알리는 기념물은 없다. 오히려 공원 한 켠에 있는 시세이(市政)회관에는 일본 정부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며 억지 주장을 펴는 ‘영토·주권전시관’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다. 100년전 조선 유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 독립을 외쳤던 곳에 이런 전시관이 들어선 데에는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은 채 과거를 쉽게 잊어버린 지금 일본의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중국 룽징서 울려퍼진 3·13 만세 외침
일제 강점하의 한반도에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여일 만에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중국 지린성 룽징(龍井) 서전(瑞甸)벌에 2만여명이 모였다. 간도 각지에서 온 한인들이었다. ‘독립선언축하회’라는 명칭이 붙은 이 집회에서 간도의 한인 대통령으로 불리던 김약연 선생이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하자 모여든 한인들은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집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서전벌에서 2km가량 떨어진 간도 일본 총영사관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조선 독립을 승인하고 철수하라’는 요구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명동학교와 정동학교 학생들이 행진선두에 선 가운데 악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분위기를 띄웠고, 참가자들은 태극기 등을 흔들며 독립선언문을 뿌렸다. 하지만 길목을 막고 있던 약 70명의 중국 지방군대가 만세운동 참가자들과 대치하다 발포하면서, 19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48명이 다쳤다. 3ㆍ1 운동 이후 최초의 해외 반일 시위인 3·13 만세운동이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주창되는 등 약소민족 독립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이광평 룽징 3·13 기념사업회 회장은 “조선인 대표들이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회의를 열고 독립선포 날짜를 정하기로 했지만,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면서 “그러던 중 3·1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준비를 서두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1990년 초반 사진을 보면 묘지에 전봇대가 서 있고, 봉분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현재는 다행히 묘소가 정비되고 커다란 석비가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시 중점문화재 보호 단위로 지정된 상태다. 하지만 이 회장은 “시간이 너무 흘러 후손이 누군지 알 수 없고, 각 묘가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서 “또 시위 때 맨 앞에 섰다가 총에 맞아 숨진 명동학교 학생 김병영 선생은 아직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3·13 만세운동 이후 반일시위가 옌볜 전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4월 말까지 40여 차례 시위가 일어났고 연인원 8만 6천여 명이 참가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연해주 지역의 3·17 만세운동에도 영향을 미쳤고, 중국의 5·4운동 이후 항일 집회에도 조선인들이 적극 참여한 계기가 됐다. 이 회장은 “3·13 운동의 가장 큰 교훈은 평화적으로는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없으며 무장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이었다”면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와 10월의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 만세운동이 항일 무장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했던 한반도와 달리 1931년 만주사변 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면서 “이곳에서는 1945년 광복 때까지 계속 총을 들고 일본과 싸웠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소도시 쉬프에서도 만세삼창
1920년 3월 1일 프랑스 중부 마른(Marne) 지방의 소도시 쉬프(Suippes)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과 애국가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조직한 파리위원부(대표 김규식) 인사들과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인 재법한국민회와 유학생들이 연 3·1운동 1주년 경축식이었다. 행사의 주축은 1년 전 프랑스로 들어온 한인 노동자 30여명. 이들은 이역만리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한해 전 조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을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를 가졌다. 이들은 러시아, 북해, 영국을 거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황기환 서기장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들어와 1차대전 격전지였던 마른 지방의 전후복구 작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마른의 베르덩 전투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70만 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냈고, 승전국 프랑스의 대규모 복구사업에는 벨기에·스페인·러시아 등에서 온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여기에 우리 한인들 일부가 참여한 것이다. 이들이 고된 노동으로 번 돈의 상당 부분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자금으로 들어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도형 연구위원은 논문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 연구’에서 “이는 당시 국외 어느 지역에 있는 한인들보다 소득대비 독립운동 자금을 많이 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년에는 쉬프 지방을 관할하는 마른 도청의 먼지 쌓인 자료실에서 당시 한인 노동자들의 명단이 최초로 발견되기도 했다. 재불사학자 이장규(파리 7대 박사과정)씨가 찾아낸 1920년 쉬프 시청 외국인 명부에는 박춘화·박단봉·차병식·배영호·박선우 등 한인 37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프랑스 도착 일자, 프랑스 정부에 체류증을 신청한 날짜, 직업 등이 남아있다. 일제 치하에서 외국의 한국인들이 일본이나 중국 국적자로 활동했던 것과 달리 이 명부에는 한인들의 국적이 한국인(Coreen)이라고 명확히 기재된 것이 특징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일제의 침략 이후 이미 소멸한 나라로 받아들여 졌기에 한인 노동자들이 한국 국적으로 프랑스 체류 허가를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한인 노동자들은 어렵게 번 돈을 십시일반 모아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돕는가 하면, 유학생과 지식인 동포들로부터 우리 역사와 지리, 국어를 배우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 분투했다.
쉬프 시청 자료에서는 한인 이도순·백오난 부부가 1921년과 1924년 낳은 ‘루이’와 ‘조르제트’라는 이름의 자녀 출생증명서도 발견됐다. 다른 한인 박병서, 박춘화가 증인을 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인들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전후 폐허를 복구하는 고된 삶을 이어가면서도 자녀를 낳아 기르고 가르치던 삶의 흔적이다. 지금도 쉬프에는 홍재하 등 한인 노동자들이 흘린 피땀과 망국의 한, 향수(鄕愁)가 짙게 밴 전사자 묘지가 마른 벌판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당시 한인들의 흔적을 찾는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파리 7대 마리오랑주 리베라산 교수 등 한국학자들은 프랑스 내 독립운동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회 ‘리베르타스’를 조직해 작년 한 해 주목할 만한 성과들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이 한인 노동자 그룹의 일원이었던 홍재하가 파리 근교에서 작고하면서 남긴 다량의 기록물이 세상에 알려졌다. 동포부부 김성영·송은혜 씨의 노력으로 홍재하의 차남(장자크 홍 푸안)이 자택에서 보관해오던 각종 서신, 임시정부 포고령,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을 알린 ‘독립신문’ 호외본 등의 존재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글_연합뉴스 차병섭, 김병규, 김용래, 정리_한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