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독립을 이끌었던, 우사 김규식 박사

■ 출생과 어린 시절
김규식은 1881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동래군수 종사관 김지성 (金智性)과 경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지성은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였으나 민씨 정권의 대일본 의존 정책을 비난하다가 귀양을 갔고, 1888년 어머니 경주 이씨마저도 사망하여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됐다. 삼촌들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고아원에다가 그를 데려다 줬다. 학교 갈 나이가 되어 김규식은 조선의 첫 고아원 겸 예수학당(경신학교)의 학생이 됐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고 해서 언더우드는 그를 ‘번개비’라고 불렀다. 이후 경신학교에서 영어와 수학, 라틴어, 신학, 과학 등을 배웠다. 이후 김 박사는 뉴저지 주의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1905년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 항일 독립운동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학교 설립, 독립군단 창설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8년 상하이로 건너와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설했고 이듬해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였다. 김규식 박사는 1919년 1월 18일부터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대표로 파견되어 일제 식민 통치의 실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박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장으로서 파리위원부에 통신국을 병설하고 회보를 발간하여 각국 대표, 언론사 및 주요기관에 배포함으로써, 3·1만세운동 등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으로부터 해방 및 독립국가로서 한국의 재편성을 위한 한국 국민과 민족의 주장>이라는 공고서와 비망록을 작성했다.
1920년대 초 고려공산당 후보당원으로 가입하고, 1922년 소련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인 대표 52명 중 1인으로 활동하면서 레닌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자 소련 정부는 한국 독립에 대한 입장이 바뀌면서 임정의 기대감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우사 김규식 박사는 독립운동에 있어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공신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독립당(상해),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의 대표를 모이게 하여 1932년 10월 25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 이 동맹을 주축으로 ‘중한민중대동맹’을 결성하고 그 다음해인 1933년 그 대표자격으로 북미각지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약 8천불을 모집해왔다. 그는 통일동맹을 지속되던 시기 동안(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일했다.
기존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각 단체 간에 연락협의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결속력, 통제력 부족이라는 한계를 지녔다. 통일전선을 성립시켜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해온 김규식 박사는 1935년 7월 대한독립당과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의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민족혁명당’에서 활동을 오래하지는 못했다.
1940년 중국 중경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한국광복군’이 창설된다. 한편으로 민족전선을 주도하던 ‘민족혁명당’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군과 한중 연합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1년 ‘민족혁명당’은 임정(=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조선의용대 병력은 ‘한국광복군’에 함께 편성된다. 그즈음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규식 박사는 중경으로 와서 임정의 국무위원, 선전부장직을 역임한다. 1943년 4월 주석과 부주석제를 채택한 임정의 5차 개헌으로 박사는 부주석이 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체제로 운영되게 되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8·15광복 이후, 남북에서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김규식은 이를 저지하기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석하는 등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박사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김규식 박사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질까 우려하게 되는데, 결국 6·25전쟁이 터지고 만다. 그는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12월, 평안북도 만포진이란 곳에서 뇌출혈, 천식, 동상 등으로 인해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정부는 김규식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김규식 박사의 성격
성격이 매우 차갑고 냉소적인 편이라 인간적으로는 친해지기 어려웠다고 한다. 전형적인 학자풍으로 정치인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당대 인물들의 주된 평가. 후일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 대행 겸 총리를 지낸 우양 허정은 그를 두고 ‘매우 냉정한 분’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또 매우 현실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일평생 정치 생명을 담보로 모험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좌우 합작을 주도한 탓에 원조 통일 정부론을 주장한 대표격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제의를 받고도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 남북 협상 당시에도 무척 적극적이었던 김구와 달리 일찌감치 북한 정권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성격이었던 셈이다.
[출처: 국가보훈처 대표블로그 – 훈터 / 나무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