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궁궐은 궁(宮)과 궐(闕)을 합한 말이다. 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만나 나랏일을 보고 임금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궐은 궁을 지키기 위해 에워싸고 있는 담장과 망루, 출입문 등을 일컫는다. 궁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조정의 관료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는 외조, 임금이 신하들과 정치를 행하는 구역인 치조, 왕비 등 임금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인 연조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 경복궁 이야기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
조선의 시작과 끝, 경복궁
경복궁(景福宮)은 태조 1년인 1395년 9월, 조선 건국 후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조선은 경복궁을 중심으 로 한양에 새로운 도읍을 만들었다. 경복궁 주변에 국 가의 근간이 되는 종묘와 사직을 세웠고 정신적 지주 가 되고 교육을 담당할 문묘, 성균관도 만들었다. 하지 만 제7대 임금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창덕궁으로 옮 겨갔고, 후대 임금들도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은 다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쟁 후 다른 궁궐들은 재건하 였지만 경복궁은 길하지 않은 곳이라는 의견이 있어 서 제26대 임금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되 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 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 하였다. 1895년 경복궁에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 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 사관으로 몸을 피했다. 이때부터 경복궁은 궁궐로 쓰 이지 않았다.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전-강녕전-교태전을 잇는 중심 부분은 궁궐의 핵심 공간이며, 기 하학적 질서에 따라 대칭적으로 건축 되었다. 그러나 중심부를 제외한 건축물들은 비대칭적으로 배치되어 변화와 통일의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수도 서 울의 중심이고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에서 격조 높고 품위 있는 왕실 문화의 진수를 느껴보자.
경복궁의 명칭 :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세워지고 3년 지난 후 완공되었다. 완공된 지 며칠 후에 개국공신 정도전은 태조의명에 따라 경복궁이라는 궁궐 이름 을 비롯해 강녕전, 교태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궁이라는 이름에는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왕의 정치를 엿보
1. 궁 궐의 중심 근정전
궐 안에서 가장 장엄한 중심 건물로 왕권을 상징하며, 왕의 즉위식이나 문무백관의 조회(朝會), 외국 사절의 접견 등 국가적 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근정전에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를 한 달에 네 번 열었다. 조회에는 미관말직도 관복을 입고 모두 참여하였다.
2. 국정이 행해지던 곳 사정전
왕의 공식적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그 이름에는 왕 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정전에서는 매일 새벽 3~5시 사이에 ‘상참(常參)’ 이라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세종은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참에 참석했다고 한 다. 어느 날 우의정 류관이 “주상께서 매일 회의에 참석 하시느라 피곤하실 터이니 하루 걸러 참석하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라고 여쭈었더니 세종은 “우의정께서 매일 입궐하기 힘드신가 본데 앞으로 그런 말씀을 하 시기 위해 오시려거든 미리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알리 도록 하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연산군 때에는 상참 과 경연이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다.
3.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 미학의 절정 경회루
경회루는 왕이 신하들과 규모가 큰 연회를 주재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연못에서 뱃놀이를 즐 기고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과 궁궐의 장엄한 경관을 감상하는 왕실 정원으로 꾸몄다.
경회루에 몰래 들어갔다 출세한 사연
일제강점기 때 헐리기 전 경회루 연못 둘레에는 사방 을 둘러싼 담장과 동.서.남문이 있었으며 궁인들도 아 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세종 때 교서관에 근무하던 구 종직이란 자가 숙직을 서던 어느 밤 경회루에 몰래 숨 어들어가 풍치를 즐기다가 왕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가 경회루를 구경하고 싶어 미관말직의 몸으로 죄를 저질렀다고 고하자, 세종은 풍류를 아는 자라 여겨 노 래를 불러 보라 하였다. <춘추(春秋)>까지 외우게 한 왕 은 다음날 구종직을 불러 정9품이던 그에게 종5품을 하사하였다.
흥청망청의 기원
흥에 겨워 즐기거나 돈을 마구 쓰는 모양새를 일컫는 ‘흥청망청’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연산 군, 경회루와 관련이 있다. 연산군은 조선의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운평(運平)’이라는 기생으로 만들었는 데, 이들 중 궁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하 였다. 연산군은 경회루 등에서 흥청들과 함께 유흥을 즐겼고, 결국 ‘맑음을 일으키는’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 하는 망청이 되었다.
4. 왕실 업무를 위한 관청 수정전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관청들을 궐외각사라 하 고, 궁궐 안에 있는 관청들은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궐 내각사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정전은 세 종 때 한글 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으로 쓰였던 곳이다.
왕의 가족
왕실의 생활이 묻어 있는 곳 왕의 침전 강녕전, 왕비의 침전 교태전
5. 왕의 침전 강녕전
왕은 이곳에서 독서와 휴식 등 일상생활뿐 아니라 신 하들과 은밀한 정무를 보기도 했다. ‘정(井)’자 모양으 로 9개의 방을 구성하여 한 가운데 방은 왕이 사용하 고, 주위의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하였다.
6. 왕비의 침전 교태전
교태전은 경복궁 창건 당시 지어진것물이 아니라 1440년(세종 22)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왕비의 침전으로 궐 안의 살림살이를 총지휘하던 곳이다.
7. 흥선대원군이 선물한 대비전 자경전
헌종(24대)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26대)의 즉위에 결정적인 기여를한 인물이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의 거처를 궐 안에서 가장 화려 하고 세심하게 만들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전에는 온돌방을 많이 마련했는데,
각 방들과 연결된 10개의 연기 길을 모아 북쪽 담장에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땅 밑으로 난 연기 길은 담 장과 그 앞으로 한 겹 내밀어 쌓은 벽 사이로 이어져 있 다.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들을 묘사하고, 위 아래 로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하여 악귀를 막 고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굴뚝의 기능에 충 실하면서도 조형미가 빼어나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 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 떠오르는 태양, 왕세자의 거처 동궁
왕세자는 새로 떠오르는 해처럼 왕위를 이을 사람이기 에 내전의 동쪽에 거처를 배치하고 이를 동궁이라 불 렀다. 서쪽의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 하던 내전이고, 동쪽의 비현각(丕顯閣)은 공부를 하며 정무도 보던 외전에 해당한다.
궁궐 사람들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9. 함화당과 집경당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 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 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수다문과 궁녀들의 소망
흥복전의 서행각에는 수다문(受多門)이 있었다. 수다 문은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었던 후궁과 궁녀들 의 소망을 그대로 반영하듯 ‘많이 받는다’는 뜻을 담고 있어 눈에 띈다.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은 궁녀는 겉치마를 뒤집어 입어 표시를 하고 그 후로는 여느 궁녀들 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
조선의 왕, 새로운 도전을 꿈꾸다
변화의물결위에서 근대국가로변모하기위한 왕의도전이시작되었어요.
10. 조선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던 곳 향원정
‘향원정’이란 이름은 ‘향기가 멀리 퍼지는 정자’라는 뜻 이다. 향원저은 고종과 명성황후가 건청궁을 세우면서 만든 정원이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 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은 고 종임금이 특히 좋아한 장소이기도 하다. 고종임금과 명성황후는 나란히 향원지를 산책하기도 하고, 향원정 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향원지는 1887년 조선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발생한 곳 이다. 당시 향원정의 발전설비는 동양에서 가장 성능 이 뛰어났다고 한다.
11. 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적인 장소 건청궁
향원정 뒤편에는 건청궁이 있다. 건청궁은 고종이 직 접 세운 건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머물던 곳이었다.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다르게 양반집과 같은 형식으 로 지어졌다. 생활공간과 손님맞이 공간이 자유롭게 지 어져 편리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건청궁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이후 경복궁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12. 청나라 건물과 조선건물의 조화 집옥재
건청궁 옆에는 청나라식 건물들도 서 있다. 세 건물의 이름은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으로 복도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집옥재와 팔우정은 중국풍, 협길당은 온돌이 놓인 조선식으로 지어졌다. 집옥재는 ‘보물을 모아 놓은 곳’이란 뜻으로 서양의 과학과 청나라의 양무운동 등 신식 학문 서적들이 4만여 권 이상 보관 된 왕실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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