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회장 이건희. [사진=인터넷]
굵고 짧았던 78년, 세상을 비꾸다.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재계 거목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20년 10월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 5개월만이다. 삼성이라는 기업을 전 세계적으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매스컴에서도 이 회장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탁월한 경영능력과 추진력 있는 발빠른 행보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삼성전자 고 이건희 회장의 일대기를 살펴보며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 사이에 3남 5녀 중 일곱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사법부속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부친 이병철 회장의 권유로 1953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1965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상과 대학을 졸업했으며, 1966년 9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1966년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재학중이던 홍라희 여사를 만나 1967년에 결혼했다.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를 시작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1970년대에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견학하며 신산업 사업 전략을 구상했다. 반도체 산업을 눈여겨보던 이 회장은 한국반도체가 파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아버지에게 인수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당시 반응은 ‘TV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 일본보다 20~30년 뒤쳐졌는데, 따라가기나 하겠는가’ 등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기술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이 회장은 자신의 돈으로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한 뒤 반도체 기술이전을 받아오기 위해 실리콘밸리를 50여 차례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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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친형들인 이맹희, 이창희씨가 관여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한비 사건)’으로 고 이병철 회장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경제계를 은퇴하게 되며, 이 회장은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삼성그룹 후계자로 본격적인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이후1987년 12월,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라는 취임사로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2대 회장이 됐다. 취임 후 1년 후인 1988년 11월,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로 흡수합병시킨 후 ‘제2의 창업’을 선언한다.
1992년 삼성은 세계 최초로 64M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이 메모리 강국 일본을 처음으로 추월하며 세계 1위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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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회장이 감지했던 위기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 1993년 품질보다 생산량을 늘리기에 급급했던 생산라인에서 불량이 난 세탁기 뚜껑을 손으로 깎아서 조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모습이 사내 방송으로 보도됐고 파장이 커지면서 질보다 양을 앞세우던 기존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의 글로벌 위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 중이었다. 이 회장은 미국의 대표적 전자제품 양판점인 ‘베스트바이’를 돌아보다 진열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삼성 제품을 발견했다. 삼성 제품이 뛰어난 품질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이 회장에게 불량 세탁기 고발 영상이 담긴 사내방송 테이프가 전달됐다. ‘많이 팔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 1위 달성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만 빠고 다 바꿔야 한다” 라는 말로 신경영 선언을 했다. 세계 곳곳에서 350여시간 동안 이어진 ‘절규’에 가까운 연설을 통해 이회장은 “양이 아닌 질 경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임직원에게 전파했다. 그리고 7ㆍ4제(7시 출근 4시 퇴근), 라인스톱제(불량이 발생하면 전 라인을 멈추고 원인을 파악함) 등 파격적 제도를 도입해 삼성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1994년 10월 삼성전자는 첫 애니콜 제품인 ‘SH-770’을 내놓는 등 휴대전화 시장에서 본격적인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휴대전화와 관련해서도 이 회장은 ‘품질 경영’을 적극적으로 강조하였다. 이른바 ‘구미 화형식’으로 불리는 불량 제품 소각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미 화형식은 1995년 구미 운동장에서 500억원 상당의 불량 전화기를 불태운 사건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가는 열린 시대를 맞아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한데 따른 조치로 1995년에는 공채에 학력 폐지라는 ‘열린 채용’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사업 체질을 바꿨고, 가파른 성장세에 접어들었다. 성장일로에 들어선 삼성이 안심하고 있을 때, 멕시코 티후아나 전자복합단지를 방문 중이던 이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이회장은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러 자만에 빠져 있다”고 강하게 질책했다. 이 회장의 질책과 함께 삼성은 내부 자만을 경계하고 장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 및 경비의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한계 사업을 과감히 정리하고 차세대 사업에 집중했다. 삼성이 비상경영에 들어간지 1년 후인 1997년,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위기에 미리 대비하고 허리띠를 졸라맨 삼성은 외환위기라는 위기 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2002년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기 시작하고 세계 전자 업계의 선도 기업이던 소니를 넘어서면서 삼성을 바라보는 글로벌 기류가 크게 변했다. 비즈니스위크,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포춘, 타임 등은 특집 형식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부상한 삼성의 성공 비결을 분석하면서 이 회장의 리더십을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는 등 이 회장의 경영 능력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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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들어 이 회장은 ‘창조 경영’을 내세우면서 신사업 개척을 강조했다. 삼성그룹은 신수종사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바이오, 나노, 로봇 등과 같은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당시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지난 70년은 삼성그룹이 앞선 기업들을 벤치마킹하고 이를 통해 초일류 기업들을 따라잡는 시기였다”며 “하지만 세계적인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한 지금은 남들이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08년 비자금 사건으로 ‘삼성 특검’이 꾸려진 이후 경영 일선에서 퇴진했다. 특검 조사 이후 삼성그룹은 수뇌부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차명계좌 실명 전환 등의 내용이 담긴 경영 쇄신안을 발표했다. 이 회장은 양도소득세 456억 원에 대한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 받았으나 2009년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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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라는 말과 함께 2010년 3월에 삼성전자 회장직으로 복귀했다. 옴니아 등 시행착오를 겪고 스마트폰 갤럭시 S 브랜드를 통해 애플 독점이나 다름없던 스마트폰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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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에는 삼성전자의 액정디스플레이(LCD) 사업부와 자회사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등을 합병해 삼성디스플레이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삼성디스플레이는 중소형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독점에 가까운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2013년 10월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서울 일원동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했다. 6년간 투병 끝에 2020년 10월 25일 서울삼성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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